어찌 보면 生 老 病 死가 우리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큰 주제가 아닌가 합니다.
어느 누구 하나라도 키워 주신 분은 다를지 몰라도 낳아 주신 분은 예외 없이 하나뿐인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인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수많은 아이를 받아준 산부인과 의사로서 아이를 받을 때마다 순간 순간 피를 말리는 고통과 갈등의 순간들이 있지만 아기를 받아 앉은 산모들의 기뻐하는 얼굴들을 대하노라면 그 동안의 수고와 염려는 눈 녹듯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 어느 모임에 나가 간혹 사춘기에 방황하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던가 부모와 자식간의 심각한 국면을 맞이하는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태어날 때 엄마 얼굴을 보고 태어났는가?" 먼저 묻곤 합니다.
어찌 보면 인간은 거짓과 사심이 들어 오기 전 까지는 의심 없이 믿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제 몸으로 낳은 아이건 하물며 입양해온 아이라 할 찌라도 자라면서 삶을 회의해 보면서 반문해 보기 전까지는 주위에서 "굴레방 다리 밑에서 주어 왔다"거나 "영도 다리 아래서 데리고 왔다"고 하면서 주변에서 엄마와 자식 간의 관계를 부정하도록 부추기지 않는 한 아이들이 엄마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믿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인간의 시작은 신뢰의 관계에서 출발 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고 먹고, 믿고 맡기고, 믿고 안기고, 믿고 주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완전한 믿음의 관계가 우리 삶의 시작 이었던 것입니다.
사단의 유혹과 사악한 의심이 우리의 삶을 불신의 세계로 몰아 넣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태어날 때 엄마의 얼굴을 본 것을 기억하거나 손에 쥐어진 징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여도 의심 하지 않고 믿는 것이지요.
본인은 분만 할 때 마다 "너는 기억 못 하더라도 내가 증인이다" 하면서 앞날의 축복을 빌어 주곤 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얼굴이나 이름조차 기억 할 수 없고 곳곳에 흩어져 만나지는 못한다 하여도 맡은바 임무를 훌륭히 감당하는 인물들이 되기를 이 자리를 빌어 다시금 기원 합니다.
어느 임신
이 자리에서 필자는 약 2000년 전 어느 먼 나라의 베들레헴이라는 동네의 마굿 간에서 있었던 "어떤 분만"을 기억해 보면서 산부인과 의사로서 산모와 아기의 임신과 출산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남녀가 결혼하여 임신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요.
마리아와 요셉이라는 부부도 본의 아니게 Honeymoon Baby(?) 를 잉태하여 막 달임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의 얄팍한 권모술수로 인하여 먼 길을 이동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교통 사정이나 의료 환경 등 제반 사회 상황으로 볼때 산모나 태아에게 무리가 됨이 분명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야 할 수 밖에 없었던 정황이 배가 남산만한 초임 산모에게뿐 아니라 남편에게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목적지에 도달 하였을 때 "빈방이 없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을 때에는 먼 길을 어렵게 어렵게 헤쳐 온 두 부부에게는 눈앞이 깜깜 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미루어 보건 데 젊은 임산부 마리아 에게는 베들레헴으로 오는 먼 길 중에 가 진통이 서서히 시작 되었으리라 봅니다.
혹시 일행 중 일가 친척 어른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친정엄마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첫아이를 가져 산달에 이른 젊은 산모가 생소한 곳에서 느끼게 되는 출산을 위한 진통의 시작은 비록 가 진통이라 하여도 두려움의 대상이며 더구나 먼 길의 이동 중에 겪는 산통은 불안과 공포의 연속이었으리라 생각 됩니다.
엄마의 마음
산과의사로서 많은 산모를 대하면서 느낀 점은 남편 없이 출산 하는 것보다 친정엄마가 없이 분만하는 경우가 가장 애처롭게 보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아마도 분만 대기실 밖에서 가장 초조해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분은 모두 산모의 엄마였으며 산모가 회복실에서 나와 얼굴을 확인 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하는 것이 친정 엄마의 마음인가 봅니다.
하여간 황당해하는 마리아와 요셉 두 젊은 부부의 모습을 통하여 그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당사자들의 마음은 오죽 하였겠습니까?
주변의 배려로 마구간 이나마 엉덩이를 붙일 수 있게 되었지만 혹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을 때 마굿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과 주변을 맴돌고 있는 마굿간 동물들을 보면서 처량하기 그지없는 신세를 탓 할 수도 있었겠지요.
곰곰히 뒤돌아 생각해 보자면 전혀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 모든 일이 진행되어 왔으며 남편 요셉의 입장에서는 아직 남편 역활도 한번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보았을 뿐 아니라 먼 길을 배부른 아내를 데리고 몇 갑절이나 힘든 여정을 지나 동물들 분뇨 냄새가 진동하는 마굿간에 자리를 잡게된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남편이라는 자괴감에 분노의 감정을 폭팔 시킬 수도 있었으니 이해 할만도 합니다.
아울러 배가 남산만하게 부른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누가 무어라 하여도 아직 남자를 가까이 한 적이없는 숯 처녀로서 본적지를 찾아가는 길이 아마 결혼 후 처음이리라 보이는데 처음 몸을 풀어야 하는 곳이 마굿간이라는 생각을 하자면 나오려는 아기도 들어가버릴 충격적인 상황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출산이란 것은 가장 성스럽고 신비스러운 것으로 응당 그만한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축복 받아야 할뿐 아니라 임산부와 태아는 의당 보호 받아야 할 권리가 있고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산모와 태아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하여도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가장 최선의 가장 최고의 예우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날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난 아기는 가장 초라한 곳에서 축복은 커녕 남들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오직 동물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태어나게 되었지요.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나사렛의 아기 예수가 탄생한 마굿간이라는 곳을 보니 예수탄생 교회가 웅장하게 자리를 잡고 그곳을 기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 웬지 2000년 전의 초라하지만 경건한 느낌을 주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예전에도 마찬 가지였겠지만 출산을 하면 아기를 깨끗하고 따뜻한 물에 씻기우고 산모에게는 미역국을 먹이우고 산모를 아름목에서 몸조리를 시키는 것이 동양의 전통적인 방식이나 어디 마굿간에서야 더운물 찬물 가릴 수 있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저마다의 안락함을 누리며 자신들이 이룬 지나온 성공의 Behind Story를 자랑 스럽게 떠들어 대고 있기에 같은 시각에 마굿간에서 일어나는 젊은 남녀가 새로운 삶 가운데 아기의 탄생을 통한 가정을 만들어 가는 참으로 복된 기쁨의 순간 - 하늘에서는 빛난 별이 비추고 음메 하면서 고즈넉하게 우는 동물들의 울음 소리와 맑은 눈망울을 껌벅 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동물들과 함께 하면서 - 마리아의 고통을 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조금만 마음의 문을 연다면 그 아름다운 소리가 들리고 놀라운 경건한 모습을 볼 수도 있을 터이나 전혀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지요.
해산의 고통
많은 산모들의 분만 과정을 지켜 보노라면 온갖 난리 법석으로 정신을 쏙 빼놓는 산모도 있고 남편을 대놓고 육두문자를 쓰는 민망한 산모들도 있으나 태어날 아기의 모습을 기다리며 한 켠에서 인내하며 고통을 삭이는 아름다운 산모들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마치 원죄의 댓가에 따른 해산의 고통을 경건하게 감내하려는 산모의 눈빛은 마주치기 조차 안스러 울 뿐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기도하는 모습으로 순산하는 것이 특징이며 세상에서 가장 괴롭고 험한 순간 이지만서도 참으로 거룩하다 하겠습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산모가 하는 일이며 산부인과의사는 다만 도와주는 것 뿐이거늘 도무지 협조가 안되어 여간 의사를 힘들게 만드는 산모들도 있으니 오랜 경험으로 보자면 아이를 만드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임신 기간 동안 태교가 중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고 이를 위하여 끊임없이 경건한 기도의 생활을 하는 것이 순산을 가능케 함은 물론 사회를 유익하게 할 인물을 탄생케 하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선택 받은 자
임신과 출산 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성탄은 동정녀 마리아의 임신으로 시작이 되므로 어찌 보면 현대 의학적인 관점에서 불가사이 한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수억 마리의 정자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의 정자에 의한 수정을 통하여 생명의 완성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니 언득 받아들이기에는 현대 과학적인 개념과 상반되나 상위의 개념인 창조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근거로 한다면 이 또한 아직 이해가 안 되는 것 뿐이지 불가능 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아직도 많은 것이 우리의 지적 능력을 벗어난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것이 많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가설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진화론만 하여도 변화의 과정을 가정한 것이므로 지금도 진화가 진행되어야 함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렇다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진화의 마지막 대기자들이 순번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므로 인간이 될 원숭이들의 스펙트럼을 언제나 볼 수 있어야 하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자 관계
우리가 친자 확인을 위한 DNA 검사를 하지 않더라도 내가 태어날 때 비록 보지는 못했지만 부모님께서 나를 낳아준 부모라 하시므로 전적으로 믿고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지요.
믿음이 우리를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내가 보지 못했다고 하여 믿지를 못하겠다고 불신한다면 불행의 서곡이 시작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 는 말씀이 있듯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다고 해서 없다고 부인해서는 안 될 것 입니다.
세상에서 인간이 대단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미물만도 못 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탄생은 참으로 경건하고 거룩한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한 세대에서 다음세대로 생명의 연결을 통한 천지 만물의 조화를 보면서 창조자 되신 조물주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더구나 창조주의 위대한 계획 가운데 특별한 의미를 갖고 이 땅에 태어난 -성탄(聖誕)- 아기 예수의 탄생은 우리에게 엄청난 축복의 사건이기에 영광과 존귀를 돌려 드려야 함이 마땅 할 것 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2000여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의 어느 한 마굿간에서 뭇사람들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태어난 아기예수는 세상적으로 보자면 서럽게 태어난 것이지만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린 택함을 받은 몇몇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지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세상의 어느 부모가 제 자식을 안락한 환경에서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기)예수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초라한 말구유에서 분만의 고통 가운데 태어 나게 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수없이 분만을 도와 주면서 산모가 격는 해산의 고통은 참으로 찢어지는 아픔 임에 분명합니다.
필자가 남자인지라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경험 할 수가 없지만 아마도 남자에게 임신과 출산이라는 역할을 주었다면 해산의 고통을 감내 할 수가 없어 이미 인류가 멸종 되어 버렸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모성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토록 산모가 대략 264일 동안의 임신 기간을 거쳐 약 10시간 안밖의 진통을 격으면서 찢어지는 산고 끝에 아기를 분만케 되는데 반대로 태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서히 조여오는 진통이 시작되면서 쥐어 짜내는 과정은 조물주의 신비로운 조화에 의한다 하여도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것으로 비유를 하여도 좋을 듯 합니다.
산부인과 의사로서 분만을 하면서 태어난 아기가 울지 안을때가 가장 난감한 떄가 되는데 산모가 하혈을 쏟아내는것 보다도 더 다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기가 울어주어야만 다음 일을 진행 할 수가 있으니 시끄럽게 더욱 울음소리가 클수록 마음이 편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분만을 받는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 일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보자면 아기가 울어주어야만 폐가 확장되고 계면 활성제에 의한 폐포의 기능을 유지 할 수가 있어 비로서 살았다 하는 호흡을 계속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기들의 울음에 대하여 구구한 의학적인 해석을 달고 있지만 필자는 험한 여정을 지나온 감격스런 울음으로 생각을 합니다.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출생직후 아기 건강 평가의 한 요소가 되며 제왕절개를 통하여 태어난 아기보다 질식 분만을 통하여 태어난 아기가 건강하다는 의학적 사실이 이를 입증 합니다.
살아가면서 무덤덤하게 사는 것보다는 감격을 맛보며 사는 인생이 복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남으로 인하여 나의 인생이 달라지는 그 감격을 느끼게 될 때 그 사람은 나에게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햇빛이 비치는 것을 보노라면 싫으나 좋으나 누구에게든지 동일하게 비치는 것으로 다만 가리개 아래로 피하는 것 뿐이며 그늘 아래서 아무리 햇빛이 싫다고 없다고 한다 하여도 햇빛은 항상 동일한 것이지요.
성탄의 의미
12월 25일을 성탄절이라 다들 Merry Christmas 라 합니다.
너나 나나 우리 모두는 열 달간의 엄마 모태에서 지내다 열 시간여의 진통 끝에 이 땅에 태어난 귀한 사람들 이기에 이세상의 축복을 누리며 살 가치가 있는 사람들 입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이때 누군가 이야기하던 " 그 아기" 탄생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그 감격" 을 통하여 기쁨으로 이해를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새해에는 누군가가 나에게 "너로 인하여 나의 인생이 달라졌다"고 감격해 하는 만남을 이루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 합니다.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나고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된다고 할 떄 찢어지는 고통의 과정을 통하여 이 땅에 태어나 비록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할 찌라도 그 나름 대로의 고귀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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