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이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하여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 가는데 주어진 생명의 길고 짧은것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살아있는것이 미운 사람’도 있고‘돌아가는것이 안타까운 사람’도 있음을 본다.
필자가 의과대학에 다닐때 전국의 의대, 치대, 한의대 기독 학생모임이 만들어졌다.
당시 70년대 말에는 전국 의(醫), 치(齒), 한(韓) 연합 수련회에 60여명 정도가 참석을 하였는데 약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은 이삼천명이 모이는 대형집회가 되었다.
한의사 문충모
초창기 멤버들 가운데 의료선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대학에서는 교수들이고 병원장들로서 사회적으로 맡은바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운데 언제나 생각나는 한사람이 있으니 그이름 석자가 문충모이다.
당시 한의과 대학생으로 기타치며 찬양을 인도하였는데 복음성가도 작곡했던 재능이 뛰어난 학생이었다.
어찌보면 문충모와의 만남과 관계가 오늘날 필자가 서양의학과 한의학을 공부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연배가 필자보다 서너살 아래이기에 개인적으로는 필자를 형으로 불러주었지만 몸이 아픈 가운데도 바쁜 한의사 생활을 하면서 장신대 신학 공부를 마치고 안수를 받으신 목사님이었다.
가장 영향력있는 기독의료단체인 한국 누가회를 이끈 이시대의 지도자로서 한때는 한의과 대학의 교수로 후진양성에 이바지하였고 한의원의 원장으로 환자진료에 최선을 다하며 이땅에 기독 의료 문화가 올바로 서기를 바라며 헌신하던 리더였다.
이시대 기독 의료인들이 삶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도록 도전과 격려를 아끼지 않던 모범을 보이셨으나 간경화와 간암으로 인한 상부위장관 출혈 뿐아니라 뇌출혈로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으며 마지막으로 아들의 간을 부분이식 받으면서까지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애석하게도 지난 3월 마지막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늘 필자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존재였으나 제대로 어려움을 나누지 못하고 함께 울어주지도 못한것이 매우 한스럽다.
형제의 한의원이 필자가 살았던 목동아파트와 지근거리에 있으면서도 몇번 찾아가지도 못했던 것이다.
필자가 미국으로 들어오기전 기러기 아빠의 마지막 어려움을 겪을때 자신의 집에서 소그룹 모임을 하면서 필자를 불러주어 교제를 나눈것이 마지막이었다.
당시에도 몸이 않좋아 얼굴은 검었고 눈은 휑하니 들어가 있으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소그룹 성경 공부 모임을 인도하였던 것이다.
문충모 목사
2002년도 필자가 떠나오기 직전에 목사 안수를 받고 동네 두부 전문 음식점에서 축하모임을 가졌던 기억이 나는데 이곳에 도착하여 몇차례 이메일 왕래가 있었으나 바쁜 가운데 두절이 되었다.
얼마전 이곳에서 발행되는‘좋은신문’에 편집 자문위원으로 문충모 이름 석자가 있음을 보고 얼마나 반갑고 기뻣는지 모른다.
언젠가 문충모 목사가‘형님도 간병으로 돌아가신것’을 이야기 해준 기억이 난다.
우리들이 죽는다는것은 정한 이치로 누구도 피해갈수가 없는 일이지만 질병으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있기에 문목사의 얼굴에서 당시 중학교에 다니던 두아들과 아내를 향한 작은 바램을 느낄수가 있었으나 그가운데서도 능히 사망권세를 이겨내는 감사와 찬양이 늘 함께하는 부활의 가정임에 분명했다.
필자가 지금도 찬양을 인도하던 문충모 학생을 기억해내는것은 당시 카메라 사진을 찍었던 관계로 기타를 열심히 치며 머리숱이 많지는 않았지만 찰랑대던 머리카락의 문충모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오랜세월 병으로 고통을 받은것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서의 편안한 안식이 더나은것으로 치부하고 싶지만 지금까지 해온일을 돌이켜보고 앞으로 해주어야 할일이 많음을 볼때 너무나도 아쉽고 안타까움을 금할수가 없는것이다.
더구나 남겨진 사랑스런 아내와 두아들을 비롯한 이땅의 수많은 누가들 그리고 교회와 병원을 생각할때 이모든것을 남겨두고 떠난다는것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손가락이 깨물려도 안스러운 아들이 배를 가르고 간을 잘라 아버지께 주었다는데 그아들의 고통을 생각해서라도 오래 살아 아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면서 부자의 정을 나누며 아버지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아끼지않은 아들에게 육신의 생명뿐아니라 자손 대대로의 영적 축복을 해주어야 할터인데 이리도 빨리 돌아가다니 너무도 슬픈일이 되고 말았다.
한국 누가회 회장 문충모
그리고 지천명의 나이에 이땅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주님의 종으로 새롭게 쓰임을 받아야 하며 기독 의료인들을 보듬고 진정한 의사 누가들로 양육시켜야 할 막중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다니 한국 기독의료계의 커다란 슬픔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제부터 필자와 한의학에 관하여 서로 의견을 나누며 새로운 현대 한의학을 재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일찍 가버린것이 애석할 뿐이다.
슬하의 두아들이 대학생이 되었으니 필자와 처음으로 만났던 시절의 문충모와 한세대가 흐른것이 엊그제 같다.
지난해 후배 선교사부인이 암으로 죽어갈때 병상에서 온몸으로 통곡을 하였다고 했다.
아마도 문충모목사의 기도와 찬양의 삶이 그러했으리라 생각된다.
“감사하다” “사랑한다” “누가회에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갔다고 하니 육신은 이땅에서 수없이 고통을 당했으나 천국으로 입성하는 영혼은 기쁨과 영광스런 찬양의 행진이었을 것이다.
이땅의 누가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순간들을 돌아보면서 참된 안식을 누리시는 고(故) 문충모 목사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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