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모자(母子) 관계의 소중함을 설명하는 표현이 너무도 많이 있다.
산부인과 의사로서 많은 산모들의 분만을 개조해 왔지만 출산의 과정만큼 극(劇)적인 만남의 장면은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피(血) 튀기며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인생의 대하 드라마이며 삶의 대 서사시인 것이다.
세상에 어머니(母)만큼 자식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관계는 없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한의학의 근본 원리인 음양 오행의 이론에 따르면 상생(相生)의 개념을 중요시 하는데 모자(母子) 관계로 설명을 하고 있다.
어머니(母)는 아들(子)을 도와주고 살리는(生) 주체로 여기는 것이다.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 오행의 운동 규율이다.
즉 어머니(母)인 목(木)은 아들(子)인 화(火)의 생아자(生我者)요, 아들(子)인 화(火)는 어머니(母)인 목(木)의 아생자(我生子)가 된다.
따라서 목(木)인 간(肝)은 화(火)인 심(心)을 도와서 살리는 것으로, 화(火)인 심(心)은 토(土)인 비(脾)를, 토(土)인 비(脾)는 금(金)인 폐(肺)를, 금(金)인 폐(肺)는 수(水)인 신(腎)을 수(水)인 신(腎)은 목(木)인 간(肝)을 도와 주고 살려주는 생(生)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오행(五行)의 원리에는 상생(相生)과 함께 상극(相克)의 원리가 있어 억제가 없으면 무제한으로 성하여 해롭다는 개념이 있다
즉 木克土, 火克金, 土克水, 金克木, 水克火의 극아자(克我者)의 억제 제약의 원리이다.
관점의 차이
이러한 원리 설명은 ‘A는 B이고 B가 C이면 고로 A는 C이다’는 삼단 논법에 근거한 논리와 상충하는 것이 되므로 현대인들의 논리적 사고와 배치되는 까닭에 한의학의 이론이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지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서양의학과 한의학 사이의 학문적인 괴리이다.
서양의학은 정확한 근거에 따라 모든 것을 객관적인 디지털 데이터로 규정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한의학은 ‘관계’를 바라보는 ‘관(觀)’에 따라 주관적인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다.
수 천년 전의 세상은 과학적인 기계로 측정 할 수도 없었기에 환자의 표현과 의사의 느낌에 따라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고 ‘그렇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을 공부한 필자의 입장에서 간(肝)을 목(木)으로, 심(心)을 화(火)로, 비(脾)를 토(土)로, 폐(肺)를 금(金)으로, 신(腎)을 수(水)로 간주하고 이들 사이의 연관 관계로 몸의 건강 상태를 이해 했던 옛 사람들의 지혜에 감탄 할 뿐이다.
물론 한방의 이론이 현대 의학적인 관점에서는 틀린 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수천년 전의 세상의 학문적 지식을 고려 할 떄 매우 훌륭한 지혜의 컨셉이라 하겠다.
수학적인 표현을 하자면 서양 의학인 집합 A와 한의학인 집합 B사이의 교집합이라 이해 하면 될 것이다.
오늘날 한의학의 나아 갈 방향은 양방과 한방 사이의 교집합의 범위를 넓혀야 할 것이며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양의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 수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품
여기에 상생과 상극의 오행이론에 따른 모자 관계의 설정이 도움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모자의 관계를 이해하면 해결 못 할 문제가 없다.
어머니의 모성애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덮어주며 도와주는 위대한 ‘블랙 홀’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지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돌아가 쉬고 싶어지는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지는 것은 인지 상정이다.
30여 년전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지어의 헤비급 경기후 패한 조 프레지어가 “어머니 돌아가 울고 싶어요”했다는 기사가 생각난다.
세기의 철권(鐵拳)들이 무시무시한 주먹을 휘두르면서도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어머니의 품이다.
몇 일전 필자의 모친께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신 적이 있었다.
의사로서 그동안 수많은 환자들의 보호자에게 “몇 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알려 왔던 필자였지만 죽음 앞에 선 어머니를 부축하면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지병을 가지고 계시며 80이 넘으신 연세라 떠나 보내 드리며 이별을 고해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으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는 것을 보면서 ‘아 이제는 가시는가 보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척 아쉽고 회한이 남는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필자가 함께 있을 때 상부 위장관 출혈의 응급 상황이 발생하였고 많은 출혈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내시경하에서 지혈이 되어 회복 중에 계시다.
물론 평소 심폐 소생술을 받지 않고 언제든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돌아 가는 것으로 말씀을 해 오셨기에 평소에 중병 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불편해도 한번도 병원을 가시지 않으셨다.
생사의 갈림 길
중환자실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 쉬고 계시는 외소한 모습의 모친을 바라보면서 50년이 넘는 지내온 세월의 모자(母子) 관계를 돌아 보았다.
특별히 몸이 불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친께서도 여느 어머니와 같이 자식을 위한 수고와 사랑을 아낌없이 주셨던 것이다.
서울 남산 국민학교를 다닌 필자는 버스 통학을 했는데 당시는 남대문 시경 앞에 정류장이 있어 학교에서 명동 충무로 신세계 백화점을 지나 자유 시장에 계셨던 어머니를 뵙고 버스를 타고 집에 오곤 하였다.
학교가 끝나고 올 아들에게 삶은 밤을 까 놓거나 당시에는 귀했던 미제(?) 쵸코렛을 사놓고 기다리시며 때론 회현동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 먹여 보내곤 하시던 어머니였다.
오십 여 년의 지나온 세월이 새롭게 떠오르며 느껴지는 어머니이나 기나긴 십대의 방황을 보였던 부끄런 자식의 모습이 송구스럽게 느껴질 따름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보(補)하고 자식은 어머니를 사(瀉)하는 보사법이 한방의 치료 원리에 속하는 것을 보니 이것이 인생사 모자 관계인가 보다.
중환자 실에 누워 힘겨워 하시는 어머니를 간병 하면서 느끼는 아들의 소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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