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7일 금요일

부활절(HAPPY EASTER )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을 ‘지구 공동체’라 부릅니다.
우주에서 보자면 동그란 지구의 모습이 앙증맞게 보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약 70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고 있는 곳이지요.
갈릴레오의 말처럼 오늘도 지구는 돌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 삼월의 화창한 봄날 아침이라면 우리가 있는 반대편 대척점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시간 구월쯤에 해당하는 가을의 밤을 맞이하고 있을 것입니다.
동그란 땅덩어리 하나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밤낮이 구분되는 일년 삼백예순닷세 하루 스물네 시간의 모습이 어우러져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창조주되신 하나님의 오묘한 조화와 능력에 감탄하지 아니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한곳에서는 밤이되어 자려 할 때 다른곳에서는 아침이되어 하루를 시작하려하며 여기는 더워지기 시작한다고 할 때 추워지기 시작하는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살이 생(生), 노(老), 병(病), 사(死)가 우리의 삶가운데 함께 공존하며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이 교차하는 가운데 하루 한순간이라도 조용할 날이 없이 온갖 사건 사고로 인하여 슬픔과 괴로움과 고통의 아픔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있다는 것이 정말 기적이라 할만 합니다.
하루의 삶을 마감하고 내일의 아침을 기약하며 잠자리에 들 때 다시금 우리에게 내일이 있을 것임을 보장해 준다고 누가 장담 할 수가 있겠습니까?
높은세상 저편에서 보면 희,로,애,락,생,노,병,사 의 인간세상을 내려다 볼수 있듯이 가까운 병원에 가면 생노병사에 의한 인간의 희로애락을 보고 느낄수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생명의 시작을 지켜보는 산부인과의사로서 수없이 많은 아기들의 분만에 관여하면서 태아의 심장 박동 소리가 있고 출생의 울음 소리가 들리면서 탄생의 기쁨이 있는 좁은 분만실에서 조차 한편에서는 뱃속의 죽은 아기를 받아내고 산모가 목숨을 잃는 생(生)과 사(死)가 함께 하며 이로 인하여 생, 노, 병, 사, 희, 로, 애, 락 의 온갖 감정이 교차 하는 모습을 볼수가 있었지요.
생(生), 노(老), 병(病), 사(死) 가운데 이로 인하여 어쩔 수 없는 희(喜), 로(怒), 애(哀), 락(樂)의 모습은 조물주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지극히 연약한 피조물의 하나임에 분명한 것이지요.
시작이 있으면 언젠가 끝날때가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좀더 붙잡고자하는 간절한 소망과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일을 돌이켜 보노라면 아쉬움과 회한이 남는 환자들이 있기도 한데 환자나 보호자분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원통함을 어찌다 이해 할 수가 있겠습니까?
길을가다 떨어진 돌에 머리를 맞아 손을 써 볼 기회조차 없는 환자도 있었고 수술방이 없어 수술 준비를 하고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다가 시간이 지체되어 생명을 잃은 분들도 있었으며 얼마전에 뵌분은 열여섯살 꽃다운 나이에 병을 진단하기 위하여 혈관 조영술을 시행하다 부작용이나서 오십여년을 우측 편마비가 되어 살아 오신 분으로 돌이켜 생각하자면 지나온 오십년의 세월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원통하겠습니까?
갑작스레 다쳐 사경을 헤메는 환자들의 경우 전혀 의식이 없으면서 호흡이 끊어지게 되며 맥박수가 점점 떨어진다 하여도 Ambubag 으로 호흡을 도와주노라면 급격히 정상의 맥박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참으로 백지장 한장의 차이 밖에 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느끼게 하며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떠올리게 됩니다.
종종 뉴스를 보다보면 구조를 위하여 던져준 로프줄을 붙잡다 놓쳐 험한 물살에 휩쓸려 내려가는 기막힌 광경을 보기도 하는데 참으로 애석하고 원통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런 장면을 크로즈업시켜 얼굴의 표정과 모습을 보게 되는 경우라면 오랫동안 그토록 비통한 모습을 떨쳐 버릴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나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생각해 보면 환자들 가운데도 그토록 살고자하는 간절한 소망의 눈길을 보이던 분들이 많이 있었으나 능력의 한계로 인하여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지 못하고 어쩔수 없이 먼저 보내야 했는데 건강한 사람이라면 일분에 맥박이 칠팔십번은 뛰어야하나 점점 느려지는 맥박을 보면서 아득히 멀어져가는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가물가물 해져 가는 맥박이 주위에 둘러선 사랑하는 가족 형제 친지들의 슬픔과 아쉬움을 뒤로하면서 먼저가는 것이 못내 서운하여 자꾸만 돌아보면서 발걸음이 안떨어지는듯 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런 연유로 상가(喪家)에 문상을 가서 배울점이 많다고들 하는 것이지요.
이지구위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기쁨과 화냄과 슬픔과 즐거움과 사랑함과 미워함과 욕심내던 모든 일들로 인해 참으로 험한 세월을 살아 왔지만서도 가지고 있는 것과 남는 것 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이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더구나 이렇게 한순간으로 서로가 영원히 헤어지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아쉽고도 원통한 것이 되겠지요.

이때 소망을 생각해 봅니다.
이토록 허망되게 끝내야 되는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하루 하루의 생활 가운데 아침에 각자 학교로 직장으로 나가면서 저녁에 온 가족이 둘러앉는 기쁨의 시간을 기약하듯이 각기 헤어지는 가족들의 모습을 연상해 봅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 아침에도 그러했기에 저녁에는 가정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의심없이 믿으면서 지금 이순간도 열심히 맡은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는 부활의 축복을 가지게 된다면 죽음을 앞둔 지금의 이와 같은 고통과 슬픔 그리고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과 원통함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부활의 소망과는 비교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생존 경쟁의 마지막 처절한 싸움터가 아니라 다음을 기대하면서 잘하기 위한 훈련연습(?)에 불과하다고 보아도 될 것 입니다.
내일의 기쁨과 축복을 위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최선을 다한 후 평안함 가운데 내일을 기다리며 안식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겠지요.

한방에서는 음양(陰陽) 오행(五行)의 원리 가운데 노(怒), 희(喜), 우(憂), 사(思), 비(悲), 공(恐), 경(驚) 일곱 가지를 우리몸을 해치고 병들게하는 내상칠정(內傷七情)으로 보고 부족하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으며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살고 죽는 것이 종이의 양면과 같음을 볼 때 음속에 양이 있고 양속에 음이 있다는 한방적 개념은 음(陰)이라고 해서 영원한 음이 아니며 양(陽)이라고 해서 영원히 양이 아닌 것이므로 이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고 좋아할 일도 아니며 슬퍼하거나 우울해 하거나 낙심하거나 걱정하거나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구 공동체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서로가 음과 양의 이치에 맞듯이 자는 사람이 있으면 일어나 일하는 사람이 있고 추운 곳이 있으면 더운 곳이 있고 어두운 곳이 있으면 밝은 곳이 있는 조화와 균형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지구 공동체로서 주어진 삶의 이치인 것입니다.
한곳에 머물러 있어도 사시사철을 맞게 되지만 지금 이순간에도 온 세상에는 사시사철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느 누가 이지구 한덩어리에 毬?삼백육십오일, 하루 스물네시간의 조화를 이루어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껏 우리 인류가 바라던 유일한 지극한 목표가 불노장생(不老長生)이었고 이를 위하여 의학(醫)이 발전하여 왔지만 어찌보면 아직 요원 할뿐 아니라 오히려 문명의 발전에 따른 반작용의 후유증이 더 많지 않나 생각을 해봅니다.
이러한 한계 상황에서 부활의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라면 이에 비할 바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시간이 얼마나 주어져 얼만큼 남아 있는 것인지 조차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서 하루 한순간을 보내는 것 그자체가 아쉽고 가슴 졸이는 일이되며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원통함이 없을 수 없지만 그로 인하여 인생이 달라지게 만든 원통한 일이 있다면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지요.
아마도 부활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애석하고도 원통한 일이 될것이며 이런 부활의 사실을 듣지도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면 어찌 통탄하지 아니 할수 있겠습니까?
이 지구상에서 칠십억이나 되는 인구가 지지고 볶지만 우리와 얼굴을 맞대며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는 않은데 그가운데 상처주고 마음 아프게하며 원통스럽게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시금 부활 주일이 다가오는 이때 구세주 예수와 부활을 생각해 봅니다.
그분은 육체적 고난으로 인한 수없이 많은 원통함을 치유해 주셨을 뿐 아니라 영혼 구원의 은혜까지 더불어 주셨지요.

여기 저기 불편한 것을 호소하는 환자분들을 대할 때 마다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며 고통을 덜어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아무리 찌르고 째고 싸매어 준다 한들 아물고 낫게 하시는 분은 오직 구원의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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